반도체·디스플레이까지 기술 유출 극성…대만 '간첩죄' 적용하는데
적발 기술유출 피해액만 23조…통계 '깜깜이', 처벌 '솜방망이'
- 최동현 기자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 2년 전 반도체 업계가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 벌어졌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설계도를 중국에 빼돌린 혐의로 구속 수감됐던 전직 임원 A 씨가 풀려난 것이다. 삼성전자는 기술 유출로 수조 원대 손해를 입었는데도, 재판부는 보증금 5000만 원에 보석을 허가했다. 현재 A 씨는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등 국가첨단전략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는 산업스파이 범죄가 매년 늘고 있지만, 구체적인 범죄 통계는커녕 사법당국의 '솜방망이 처벌'도 제자리걸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기술 격차를 좁히며 맹추격하는데, 한국의 산업 경쟁력 지표인 첨단기술의 울타리마저 구멍이 뚫린 격이다.
기업들은 특허침해 소송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피해 보상도 쉽지 않다. 특히 기술 유출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어서 범죄 예방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미국이나 대만처럼 산업스파이에 대해 '간첩죄'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LG디스플레이(034220)는 지난 13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 동부지방법원에 중국 디스플레이 제조사 티안마를 상대로 7건의 기술 특허 침해 소송을 냈다. LG디스플레이가 중국 업체를 상대로 쟁송에 나선 것은 처음으로, 티안마가 액정표시장치(LCD)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핵심 기술을 무단 사용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한중 디스플레이 업체 간 소송전은 처음이 아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 3월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 BOE를 상대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한 OLED 특허 침해 소송에서 승소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텍사스 동부지법에 동일 사건 소송을 제기했고, 별개로 BOE 및 자회사를 상대로 ITC에 영업비밀 침해 소송도 제기했다. 이달에는 또 다른 중국 업체 CSOT을 상대로도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한국은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등 다수의 첨단 제조업에서 글로벌 시장 1위를 유지 중이지만, 동시에 호시탐탐 시장 주도권을 노리는 중국 등 경쟁 업체들의 기술 탈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등 반도체 업체는 물론, 국내 1위 배터리사인 LG에너지솔루션(373220)도 지난해 5월 580건의 전략 특허가 탈취당한 사실을 밝히며 칼을 빼든 바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기술 유출 검거 사건은 27건으로 2021년 국가수사본부 출범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해외 기술 유출 검거 건수는 최근 3년간 12건→22건→27건으로 매년 두 자릿수씩 늘고 있다. 특히 전체 기술 유출 사건 중 해외 유출 사건의 비중은 2022~2023년까지 10%대에 머물렀지만, 지난해에는 22.0%까지 치솟았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산업기술 해외 유출에 따른 피해액은 약 23조 원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산업 스파이 범죄가 갈수록 음지화·지능화하는 탓에 수사당국이나 피해기업이 적발·인지하는 사건 외에 전체 유출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조차 '깜깜이'인 현실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국가첨단전략기술을 다루는 기업들은 △스마트폰 보안 프로그램 의무 설치 및 카메라 기능 제한 △USB 사용 금지△보안 용지 사용 △외부 반출 서류 및 메일 의무 인가 절차 등 핵심 기술 보호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기술 유출을 원천 차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하소연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임원급이 경쟁사로 옮기는 경우가 아닌 일반 직원은 모니터링이 어렵고, 그마저 사찰 소지가 있어 적극 대응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경쟁사가 핵심 기술을 뭉텅이째 훔치기보다 복수의 내부자를 통해 조각 모으듯 유출하는 경우가 많다"며 "적발은 물론 입증도 쉽지 않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체 기술 유출 사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검거율 통계'조차 없는 실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실제 검거해서 송치한 사건 건수 외에 전체 발생 사건 대비 검거율은 별도로 유지하지 않고 있다"며 "산업통상자원부, 검찰 등 기관마다 인지하는 (기술 유출) 사건 숫자도 다른 실정"이라고 말했다.
사법당국의 '솜방망이 처벌'도 산업계를 울리는 대목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대법원 사법연감을 토대로 2021년 기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처리된 1심 형사공판 33건을 조사한 결과, 무죄 또는 집행유예 비율이 무려 87.8%에 달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지난해 기술 유출 범죄 양형 기준을 최대 18년까지 늘렸지만, 여전히 절반가량의 사건이 집행유예로 끝난다는 게 업계 안팎의 전언이다.
업계 관계자는 "사법부가 양형 기준을 크게 높이는 등 의지를 보였지만, 증거를 잡기 어렵고 피해 규모를 산정하기도 어렵다"며 "국가적 피해를 주고도 미미한 처벌로 끝나기 일쑤"라고 토로했다. 실제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는 2015년 관련 논문을 통해 "산업기술 유출 사례가 지속해서 늘어나는 이유는 영업비밀 유출로 얻게 될 이익이 처벌 가능성에 비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라고 짚기도 했다.
대만은 핵심기술 유출 범죄에 '간첩죄'를 적용하고 미국은 30년 넘는 징역형을 부과하는 등 주요국가들은 철저히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 대만은 2022년 국가안전법을 개정, 국가핵심기술의 영업비밀을 취득하거나 사용·누설하면 간첩죄로 처벌한다. 미국은 기술 유출에 따른 피해 액수에 따라 최대 405개월(33년 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한다. 한경협이 국내 기술 유출 사건에 미국 양형 기준을 적용한 결과, 최대 21년 10개월의 징역형이 도출됐다.
우리 정치권에서도 처벌 조항 강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박덕흠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2월 국가핵심기술 유출 범죄는 형량과 벌금을 각각 3년 이상→5년 이상, 15억 원 이하→65억 원 이하로 상향하고,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각각 15년 이하→20년 이하, 15억 원 이하→30억 원 이하로 높이는 내용의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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